Awaken Realms/GrimCoven

AR의 패러디가 보여주는 것

Solo Player 2025. 7. 6. 17:15

룰북 번역이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몇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있어서 기존 업데이트를 뒤적뒤적했는데 기본 설정이라고 소개한 걸 보니, 뭐랄까, AR이 풍부한 장르물 라이브러리를 가진 긱인 건 알겠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베껴 휘저어 섞어버리는게 아닌가 싶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것은 어떤가?

 

 

배경이 되는 크로우홈에 왜 괴물이 넘쳐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우연히 Lament(포멀한 명사로는 애가, 애도 정도로, 일반 동사로는 애통해하다, 비통해하다 정도로 해석되는 단어. 하지만 번역 룰북에는 哀苦라는 번역어를 차용했다. Lament는 설정상 타인의 고통을 흡수하여 슬픔으로 응축되는 물질이고, 습득한 이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어 존재를 변화시키는 물질이라, 슬퍼하고 괴로워한다는 의미의 애고(哀苦)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영어 ego와 발음이 흡사하고 ego가 지나치면 혐오스런 나르시스트로 변화된다는 맥락과도 일치해서 아주 기쁘게 빌려왔다.) 를 발견했고, 이를 치료에 사용하다가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함부로 남용한 과학자/의학자들이 파멸을 불러왔다는 설정은, 직접적으로는 게임 <블러드본>의 '피의 치료'에서 가져온 아이디어고,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까지, 계보를 추적하면 영지주의와 연관된 북유럽 설화(가령 데미우르고스 신화가 변형된 미친 연금술사의 민담)까지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이렇게 가져온다고 문제될 건 없다. 하지만 플러스 알파라고 할만한 그 무언가가 없는게 아닐까. 패러디의 생명은 추가되는 그 '무엇'에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텐데 말이다.

 

하나 더 골라 본다면,

 

 

 

이건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1권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설명이다(공교롭게도 다크 타워 1권의 부제가 The  Gunslinger 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다크 타워와 맞서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전사는 Gunslinger의 칭호를 받고, 다크 타워와의 끊없는 투쟁을 반복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지쳐 고향에 돌아온다. 그는 다크 타워와 맞서 싸울 다음 전사를 기다리며, 마을의 어린 '놈'들을 (고문에 가깝게) 훈련시키며 나이를 먹는다. 그러다 운명의 젊은 전사가 자신이 가르치던 '놈'들 사이에서 나타나면, 경의를 표하고 그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 뒤 장렬히 패배한다. 패배 후 죽어가면서 Gunslinger 칭호를 내린다... 이건, 그 설정을 곧바로 가져온 거 아닌가.

 

"올드 플린트록(Old Flintlock) 총사銃師의 후예인 건슬링거는 늘 사냥을 꿈꾸고, 사냥터의 팽팽한 긴장을 들이마시며, 사냥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건슬링거는 늘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며, 악몽에서 나올법한 (애고에 의해 태어난) 기괴한 몬스터들을 죽여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전통의 이름으로 손위 건슬링거를 제거할 젊은 건슬링거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 이후, 사냥은 계속됩니다…" (올드 플린트 부분은 약간의 의역을 더해 플린트록으로 변경)

 

게임이 재미있다면, 그리고 풍미를 더하고 흥미를 돋운다면 어떻게 패러디하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다만, 이 모두를 묶는, 또는 각각을 패러디하며 반짝하는 아이디어를 더했다면 유저는 더욱 감탄하지 않았을까. 이런 사실을 모르는 디자이너, 라이터들이 아닐텐데, 이렇게 급하게 끌어와 뒤섞어 버린다는 건 AR이라는 회사가 빡빡한 일정에 맞춰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장제 기업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으으윽! 오늘은 이만 할래. 일요일에 시간이 난다고 너무 오래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그만. 아오 시장하다!